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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플립. 첫눈에 반하다.

줄리와 브라이스, 소녀와 소년이 만들어가는 깜찍하고 귀여운 이야기다. 이웃집에 이사온 소년 브라이스에게 첫눈에 반한 줄리는 자기 눈에 비친 브라이스가 자신처럼 좋아한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는 줄리 세계관에서 한 참을 보여주고, 연이어 같은 상황을 브라이스 입장에서 해석을 들려준다. 동일한 공간 시간속에서 둘이 함께 있는 장면은 구라사와 아키라 감독 "라쇼몽"(1950년작)처럼 각각이 바라본 시각이 모두 다른 세계임을 보여준다.

 

어린시절에는 좋아하는 이성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지를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나를 향해 무표정한 모습조차도 아름답게 해석되는 시절이었다. 현실은 잔인하리만큼 이해할 수 없는 결과들을 받아드려야 한다고 했다. 실제 추측이 맞아 그애도 나에게 호감이 있었다더라도 그애가 보여주는 행동도 생각과는 다른 행동을 보여주곤함으로 헷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십대시절 이성에 느낀 좌절감과 혼란스러운 감정만큼 세상도 이해할 수 없는 광경투성이었다.

 

플립에서 두 아이들이 겪는 감정이야기는 흔할 수 있다. 영화에서 소재로 삼은 동네 버스정류장 인근 오래되고 큰 플라타너스 나무 벌목에 대한 이야기와 이를 막고싶은 줄리 행동은 지역신문에 크게 실린다. 브라이스 할아버지와 줄리가 함께 가난한 줄리 집앞 정원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는 흔치 않는 사람에 대한 교감을 보여준다. 브라이스 집안은 얼핏 부러울 것 없는 중산층이 가진 삶을 보여주지만, 마음에 꿈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허무와 분노를 자연스럽게 배출한다. 반면 줄리 집안은 아버지 동생이 정신장애로 인해 많은 시간과 경비를 들임으로 형편이 어려워 자녀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지원을 하기도 어렵지만 아이들은 꿈을 잃지 않고 건강하고 맑은 에너지로 성장하고 있다.

 

줄리는 학교행사에서 달걀을 부화하는 것을 성공시켜 일등을 수상한다. 이후 줄리는 집에서 닭을 키우며 달걀을 얻게되고 많은 양으로 인해 이웃에게 나눠주고 적지만 돈까지 벌게 된다. 그리고 좋아하는 브라이스에게도 이를 나눠주지만 불량한 위생에 전염병을 걱정하는 브라이스 부모들때문에 계속해서 버리게 되고, 어느날 그 장면을 줄리가 보게된다. 그동안 브라이스가 줄리에게 보여준 냉담함과 형식적인 대꾸에도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지만, 이제 줄리도 브라이스가 좋은 사람임이 아니라고 느끼게 된다. 브리이스는 학교내 최고 인기남이었고, 줄리는 독특하고 당당하지만 최고는 아니었다. 학교 자선행사에서 남학생들에게 돈을 지불하는 경매가 열리고 줄리는 달걀로 얻은 돈을 가지고 참석하게 된다. 줄리가 점점 냉담해지는 것을 알게된 브라이스는 오히려 줄리에게 강한 호감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을 선택하지 않고 앞선 소년에게 경매를 신청하는 줄리를 보고 질투가 폭발한다.

 

그리곤,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랑, 성장을 주제로 보여주는 영화처럼 이들도 오해를 풀고 화해하며, 잘린 플라타너스 나무와 똑같은 나무를 줄리 정원에 브라이스와 함께 심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황순원 소설'소나기'(1953년작)에서 시골소년과 매일 마주치는 윤초시네 증손녀가 가까워 지는 이야기를 나는 지금도 내 인생에 가장 사랑하는 작품으로 꼽는다. 시골 소년 마음에 흠뻑 몰입되어 죽기전 소녀가 입고 있던 보라색 옷을 함께 묻어달라던 유언을 듣는 그 소년이 나인 듯 했다. 소녀가 비를 맞는 것을 피하기 위해 수숫단에 공간을 만들어 함께 들어간 순간, 미처 몸을 다 피하지 못하고 걸쳐있던 소년과 좁은 공간에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던 소녀에게서 나는 향긋한 냄새는 마치 내가 맡고 있다는 착각을 들게하듯 전해져 왔었다.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버킷리스트'를 만든 롭 라이너가 연출했다. 우리는 이야기 속에 살고 있다. 물리적 실체를 가진 물체들의 충돌과 결합, 변화무쌍한 리듬과 조화가 아니다. 물질들이 합쳐진 전체로서 인간은 물질적이지 않다. 상징과 은유, 환상과 상상이 결합된 이야기체이다. 물질체가 아닌 이야기체가 만들어가는 리듬과 조화이다. 감수성과 도덕감각이 우리를 아름답게 한다. 누가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음표들이 모여 음악이 되듯이 아름다운 선률을 만든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기 보다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정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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