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상영한 노트북, 나는 2004년에 뭘하고 있었을까. 한일 월드컵이 2002년에 있었다. 그 열기와 광분을 흐릿한 장면들로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사라진 것일까. 2004년에 무엇을 했는지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2003년 9월경 태풍매미가 휩쓸어 도시 전체가 며칠간 정전이 되었었다. 그 다음해는 태풍을 수습하고 일상을 회복하려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긴한다. 2026년 5월 6일 낯선 태국에서 노트북을 다시 보았다. 레이첼 맥아담스, 라이언 고슬링 두 배우가 만들어낸 장면들을 나는 잊고 있었다. 봤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기시감이 드는 장면을 내가 본 것인지, 착각하고 있는지 헷갈렸다.
비오는 날을 나는 좋아한다. 화면 가득히 비가 내리면 내 마음은 심장으로 부터 전해오는 감동을 느끼곤 한다. 그것은 심장이 주는 향기같다. 누구나 10대시절 전후에 느낀 감정들은 또렷하게 느낀다. 특히 좋아하는 감정들은 평생 자워지지 않는다. 영화 스크린을 가득 채운 비내리는 풍경과 빗소리는 심장을 사랑안으로 물들인다. 한때, 비 오는 소리만 듣는 것을 즐긴 적이 있다. 조용한 산골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실개천에 떨어지는 빗소리, 조용한 사찰에 녹음으로 물든 산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처마 아래 앉아서 듣는 빗소리는 들을 때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없는 자유인된 기분을 느끼게 하여 마냥 좋았다.
영화 "노트북"은 19세기초 젊은 남여가 첫 사랑을 느끼는 과정을 묘사한다. 현실적 난관과 부모가 반대하는 사랑속에서 그들이 느끼는 강렬한 끌림과 헤어짐으로 인한 고통을 라이언 고슬링이 가진 깨끗하고 담백한 눈빛으로 보여주는 서사는 흔한 이야기이지만 현실보다 더한 공감을 불러온다. 십대시절에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는 것처럼 불투명하고 어리석고 순진하다. 50대쯤 나이가 들면 세상은 불투명하지도 않고 당연한 것은 당연한데로 흘러간다는 것을 안다. 안다는 것은 인간 관계에서 만들어내는 결과들이 그렇게 다양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흔히 MBTI에서 정의하는 16가지 유형을 통해 자신을 비춰보면 놀라울 정도로 자신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십대시절 신분에 맞지 않는 남여를 반대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현실이다. 그 결과를 뒤집고 만남을 성공했어도 인생은 그렇게 다양한 결과를 만들지 못하고 비슷비슷한 형태를 가진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시절 우리가 느낀 감정은 사랑에 대한 결실과 무관하게 우리가 가진 투명하리만큼 선명한 감각기억들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운 감정을 선사한다. 그 아름다운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신호들은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바라보면 무지개나 오로라 만큼 환상적인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지금으로부터 22년전에 내가 느꼈던 감수성을 흐릿하게 엿보게 되었다. 서릿발 처럼 차갑고 폭설처럼 추웠던 그 감각기억들에 대한 잔상들을 깨운다. 레아첼 맥아담스는 새로운 사랑을 만나 결혼을 앞두고 있다. 첫사랑 라이언 고슬링을 다시 만나 옛 기억들을 간직한 곳을 다시금 거닐고 다니면서 그 옛시절 아름다운 감각들이 깨아나고 새로운 약혼자를 사랑하는 마음과 첫사랑을 만나서 다시 느끼는 사랑하는 감정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다시 만난 첫사랑과 배를 타고 가다, 레이첼은 왜 편지를 하지않았는지 원망한다. 라이언은 3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비가 내린다.
내리는 비는 두사람을 흠뻑 적신다. 그리고 그들이 옛시절 사랑을 나누던 그 약속의 집에서 다시금 사랑을 나누게 된다. 우리는 모두 10대시절을 그리워 한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 내게 다시금 10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가고싶냐는 질문을 받을 때, 그 시절 초라하고 나약하고 서투른 시절로 가고싶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나는 나이듦이 좋았다. 그 어린 나이에 내가 겪었던 감정적 부끄러움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또다른 감정상태로 넘어가는 중이다. 초라하고 부끄러웠던 그 시절, 내가 느꼈던 감성적 감각들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기억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들이 점점 흐릿해지는 것도 문제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일화기억들도 점점 빠르게 잊어간다. 어떻게 내가 이 영화를 보았다는 것을 잊고 있었을까.
노트북의 마지막 장면은 기억을 잃은 레이첼과 그녀곁에서 기억을 잃은 그녀를 위해 자신들의 사랑이야기를 읽어주는 남자의 이야로 시작하고, 그 남자가 사실 기억을 잃은 여자와 오랫동안 살아서 장성한 자녀들을 둔 그 남자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노년이 된 두 사람이 짧은 기억회복 순간에 영원을 약속하면서 두손을 잡고 병실에서 잠들어 운명한다. 사랑이 존재할까. 그것은 어떤 형태일까. 사랑은 기억이다. 감수성 가득한 감각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십대시절 온몸에서 생생하게 느껴지는 감각과 리듬, 그리고 향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 푸켓에서는 밤만 되면 번개가 치고 폭우가 내린다. 창가에 내리는 비를 좋아했다. 젖지 않고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포근함과 친근한 비내리는 순간은 나를 또다시 심장이 선사하는 묘한 세계로 물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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